슬기로운 사회생활 (feat. 2년간의 법정투쟁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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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변호사 이야기 ⓵
(※ 지금부터 저와 김변호사의 시점을 오가며 교차편집으로 서술합니다.)
사무실로 의뢰된 민사소송건으로 등기부 열람중인데 대표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어.
어떤 의뢰인이 나를 콕 집어서 사건의뢰를 하고 싶어 한다고.
아니...날 어떻게 안대요?
대구변호사협회에서 검색한 거 같던데.
허...그거 참.
검색해서 나오는 내 정보를 봤으면 오히려 다른 변호사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 변호사자격 취득하고 이제 2년차인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지. 남자가 받더라고.
그래서 사무실로 한 번 오시겠냐고 했더니 대뜸 사무실 말고 바깥에서 좀 편하게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더군. 그래서 일단 법원 근처 파리바케트 앞에서 보기로 했지.
무슨 사연인가...싶었어. 말투도 그렇고 밖에서 만나자는 것도 좀 이례적이고. 살짝 호기심이 들더라고.
땅거미가 지고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길래 약속한 그 파리바케트 앞쪽으로 걸어갔어. 횡단보도 신호등을 기다리며 맞은 편 파리바케트 앞을 스캔했지. 벌써 와 있을라나...하면서.
한 서 너명이 서 있었는데 딱 보는 순간 한 눈에 저 사람일 거 같다라는 느낌의 남자가 있더군. 신호가 바뀌고 그 사람을 응시하면서 길을 건너는데 반쯤 건넜을까,,,,나랑 눈이 마주친 그 남자도 내가 자기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온 듯. 시선을 안 돌리고 계속 쳐다보더라고.
혹시,,,000씨?
아. 네. 김000 변호사님?
그렇게 악수를 끝내고 일단 내가 잘 아는 국밥집으로 가시겠냐고 햇더니 좋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식당을 향해 걸어가면서 내가 물어봤어.
걸어가시면서 혹시 사건 내용 간단하게 들어볼까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그전에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 있다는거야. 먼가요? 했더니 그 친구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마치 한숨처럼 내뱉었어.
저는 살인전과가 있고 현재 가석방자 신분입니다.
헉,,,,갑자기 멘붕이 오더군. 분위기가 형사사건 의뢰인거 같은데 의뢰인이 살인전과에 가석방자 신분이면....더구나 이제 난 막 변호사자격 취득한 2년차 병아리 변호사인데. 이건 마치 초등학생에게 행렬이나 삼각함수 문제를 풀라는 격이잖아.
솔직히 그 자리에서 돌아서고 싶었어. 죄송하지만 좀 버거울거 같습니다,,,하고.
그 친구도 자기 말 듣자마자 내 안색이 변하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말도 안더라고. 상세한 이야기는 식당에서 말씀드리겠다며. 5분 거리였는데 둘 다 아무말 없이 걸어갔어.
걷는 내내 나는 어떡하면 이 자리를 좀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고.
식당에 도착했는데 그 친구가 조용한 방이 좋겠다고 해서 홀안쪽 룸으로 들어갔어. 그리곤 주문한 밥이 나올 때 까지도 우린 서로 아무말이 없었어. 진짜 어색하고 미치겠더라고.
밥이 나왔고 같이 반주로 주문한 맥주를 한 잔씩 따랐는데 그 친구는 밥숟가락은 들지도 않고 맥주만 마셨고 나는 맥주잔은 들지도 않고 밥숟가락만 들었어. 내가 딱 두 숟갈 먹는 걸 보더니 이윽고 그 친구가 말을 꺼내더라고. 제가 준비해온 서면이 있는데 밥 드시면서 편하게 읽어 보시라면서 종이서류를 주더라고.
A4용지 6장 분량인데 거기다 빽빽하게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혐의, 그리고 사건의 실체적 진실, 자신의 심경, 심지어 자신이 생각하는 앞으로의 변론방향 등등이 적혀있었는데... 그걸 받아들고 딱 세 줄을 읽은 후 나는 더 이상 밥숟가락을 들지 않았어. 아니 들 수가 없었지. 압도적인 문장이었어. 그래서 밥 먹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서 그 빽빽한 글을 한번에 다 읽었지. 아직도 기억에 남는게....그 글 말미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
자신은 종교를 가지지 않는다. 혹여나 종교에 귀의해서 회개하고 신에게서 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자기최면으로 죄책감을 덜어낼려는 그런 얍삽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기는 평생 자기가 지은 죄를 아프게 느끼면서 살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의지가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 인정하는 걸 포함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정신이 번쩍 들더군. 그리고 온몸에 전율이 돋았어. 뭔가....이 사건이 내 변호사 인생 최대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리곤 내가 물었지.
혹시 여기 적혀있는 내용 모두 진실입니까?
그랬더니 그 친구가 그러더군.
혹시나 변론과정 중에 지금 거기 적혀있는 내 이야기와 다른 부분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변론포기하셔도 된다. 그리고 수임료는 한 푼도 돌려받지 않겠다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
“해봅시다.”
그리곤 처음으로 맥주잔을 들고 그 친구랑 건배를 했지.